경영대 이종민

강원대학교 학칙 제2장 제4절은 ‘교수회와 평의원회’에 관한 규정이다. 제18조에서 제20조까지는 ‘대학별 교수회‘에 관한 내용으로 신설된 조항들이다.

“이 대학교에 대학 운영의 민주화와 교수의 권익을 신장하고 연구 및 교육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이 대학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전임교원 전원으로 구성되는 교수회를 두고, 캠퍼스별로 분회를 둔다.”(강원대학교 학칙 제 18조).

이어 제21조에서 제25조까지는 평의원회에 관한 내용 등이 망라되어 있다. 사실 평의원회는 기존의 조직이므로 구성원이 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이 대학교의 발전과 교육에 관한 주요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강원대학교 평의원회를 두고 캠퍼스별로 각각 평의원회 분회를 둔다.”(학칙 제21조).

교수들의 관심 여부와 관계없이 2018년 3월부터 강원대학교 교원이라면 선택의 여지없이 모두가 회원이 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조직인 교수회가 출범한다. 교수가 대학행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기구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학칙에 정식으로 반영되어 있으니 학내에서 분명한 위상을 갖는 기구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 단대별로 교수회가 존재하는 대학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대학들도 있었다. 그러나 3월부터는 해당 대학(전문대학원 포함) 소속 전임교원 전원으로 구성되는 대학별 교수회를 두게 되어 있어 교수회가 더 이상 단대별 선택사항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관련규정을 들여다보면 실제 역할은 매우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교수회라는 새로운 기구가 왜 굳이 필요한가? 또 기존의 심의기구인 평의원회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당연한 의문에 대한 답이 중요한 건 여전히 헷갈려하는 많은 구성원들에게 교수회라는 조직을 제대로 인식시키고 또 교수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는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칙에 반영된 기구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모든 의문이 소멸되는 건 아니다. 조직에 대한 존재 이유야 그럴듯하지만 교수회는 대학의 주요 사항에 대한 심의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학칙상 두 조직의 병존이 왜 필요한지 구성원들이 의아해 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오히려 교수회장이 평의원회 의장을 겸하게 되어 있고 또 단대별 평의원을 교수회에서 선출하기 때문에 교수회장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교수회가 회장의 전위대 내지 옥상옥이라는 볼멘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교수회장인 동시에 평의원회 의장은 대학운영과 관련하여 대학 본부의 집행부를 견제하는데 있어 교수회라는 우군에 힘입어 종전보다 한층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커졌다. 반면에 교수회 자체는 교수회장을 고리로 자신의 이해를 효과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확보한 셈이다. 이렇듯 외적으로 비쳐지는 공생관계의 모습은 차치하더라도, 문제는 조직의 운영에 있다.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누구나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대학본부의 재정지원일 것이다. 하지만 지원받을 명분은 무엇인가? 교수회가 대학본부의 정책이나 주요 안건에 대해 (심의는 직접 못하더라도) 간접적으로 간여하면서 강한 목소리로 견제하는 감시자로 자처할 경우 대학본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게 과연 대의명분에 맞는 노릇일까? 교수회인 만큼 회원들에게 회비를 징수하여 운영하는 게 합당한 선택이 아닐까? 설령 징수 문제에 경우의 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런 생각이 전혀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아니므로 누군가는 계속 의문을 품을 여지가 있다. 아무튼 어떤 조직이든 새로 탄생하면 으레 많은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제기되는 여러 의문과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조직의 정체성을 보다 명료하게 정립하여 새 역사를 써 나가기를 바란다.

교수회 출범을 계기로 개인적인 두 가지 소망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교수회가 학내 소통을 선도적으로 주도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대학 내 시빗거리들이 본질적으로 구성원들 상호간 의사소통의 부재 내지 부족에서 온 것을 감안하면 교수회의 설립은 대학 내 소통의 채널이 하나 더 생겼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물론 의사결정의 효율성 측면에서 교수회 결성으로 종전에 발생치 않았던 지체비용(delay costs)이 생길 수 있고, 나아가 구성원 간 갈등의 빈도가 늘어날 개연성도 커진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마찰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성원 간 사전 소통이 한층 강화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의사소통에 틈이 생기면 오해가 발생하고 헛소문이 그 빈틈을 메워 어느새 조직 전체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전염시키는 일을 우리는 최근 본부 발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뼈아프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구성원 간 신뢰관계가 바탕이 되지 않는 한, 아무리 규칙을 잘 구비해 놓더라도 그건 종종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의사소통이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또 하나는 거의 고사 직전에 있는 대학 본연의 공동체 정신을 교수회가 앞장서 복원시켜 주기를 희망한다. 어느새 이 나라의 모든 대학은 평가의 퍼핏(puppet)이 되어 있다. 각종 평가를 빙자한 경쟁적 머니게임(game for money)을 통해 교수들은 부지불식중 주변 문제에 무디어진 지식인 집단으로 전락한 게 현실이다. 최근 대학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이기주의 심화(Big “I”)와 공동체 의식 약화(Small “We”)는 그런 세태를 반영한 결과이다. 심각한 것은 그런 현실이 우려수준을 넘어 대학사회를 소리 없이 붕괴시킬 내부의 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빅 위 스몰 아이(Big “We” Small “I”)로의 의식의 전도(overturn)가 교수 사회에서 맹렬히 일어나야 한다. 유⋅불리의 손익만을 따지는 천박한 집단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의식을 갖는 지성적 주체로 다시 태어나도록 교수회가 선도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메시아를 대망하곤 한다. 이제 막 출범하는 교수회에게 그런 무거운 과제를 던지는 것은 교수회로 하여금 소위 메시아적 역할을 하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어쩌면 추상적이고 공허한 목소리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발아래를 보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너무나 절실한 문제들이다. 따라서 신생 교수회에 너무 가혹한 말인지 모르지만 “불위야 비불능야”(不爲也 非不能也: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담대히 말하고 싶다.

무슨 일에서든 중요한 건 처지가 아니라 ‘의지’이다. 우리 대학 교수회가 대학 운영의 민주화와 교수의 권익을 신장하고 연구 및 교육환경을 개선할 충만한 의지만 있어도 우리 공동체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자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선구자를 기다리지 않도록 교수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예리하게 다듬어 그것을 기치로 올곧은 의지를 활활 불태우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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