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 김유동

대학에 여유를 허하라

십 년 전 교수가 되어 좋았던 일 중 하나는 연구실이 생긴 것이다. 박사논문을 쓸 당시 가족과 함께 살던 기숙사에 공부방이 없어 거실에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곤 했다. 사정이 이랬으니 연구실은 내가 받은 큰 선물이었다. 그런데 연구실은 그동안 많이 변했다. 그곳은 책과 서류가 벌이는 소리 없는 각축의 장이 되었다. 서류들은 테 두른 모자를 쓰고 가슴에 적힌 마감일을 내게 가리킨다. 나는 새로 온 그 가볍고도 무거운 서류를 보기 좋은 그 곳에 놓아둔다. 그 옆에는 이미 많은 서류가 ‘나란히’ 누워있다. 반면 내가 충동적으로 사놓고 곧바로 책장에 꽂아둔 책들은 빽빽이 선 채로 침묵시위 중이다. “결국에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서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보면서 우리는 펼쳐보지도, 아니 꺼내지도 않은 채 가둬 놓기만 하다니!” 그들은 아마 내가 변했다고 생각하리라. 미안.

물론 대학 홈페이지의 각종 교직원 관련 메뉴가 없다면 연구실 같은 사무실의 완성, 스스로 자기성과를 관리하는 신자율형 교수의 완성은 불가능하리라. 대학포탈과 코러스의 요구대로 자료 입력하기, 성인이 다 된 학생들의 꿈 ‘데이터화’ 하기, 일 년 내내 ‘교수연구학생지도’ 관련 서류 작성하기(방학 때 강의개선사항 고해하기 포함) 등은 교수의 중요 일과 중 하나이다. 학과장일 경우 컴퓨터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물론 더 많아진다. 어떨 때는 수업에 업무가 방해되는 것인지 업무에 수업이 방해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짬짬이 책들을 달래본다. 그래, 너희들도 소중하지.

그래도 교수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하는 것은 당근과 채찍을 들고 기간 내에 성과를 내라고 요구하는 교육부와 대학이다. 설명회가 열리고 학과(장)회의가 반복된다. 이에 대해선 언급하고 싶지 않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몸과 마음이 아프다. 구조조정에 관련된 사항을 논의하거나 사업계획 작성에 몰두하다 전공 서적을 펼쳐볼 때 생기는 그 아득한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대학은 크고 뜨겁다. 반면 교수는 작고 냉담하다. 난 솔직히 연구실 문을 열 때가 아니라 집에 돌아와 대문을 열 때 기분이 좋다. 집이 내가 원하던 연구실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문학은 느린 학문이며 나이의 학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넓게 많이 읽어야 내공이 쌓이고, 여유를 두고 반복해서 생각할수록 판단착오와 논리적 결함이 줄어든다.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부지런히 쓴 논문은 확실히 더 만족스럽다. 좋아하지 않았던 작가의 빛나는 지혜가 보일 때까지는, 좋아했던 작가에 대해 거리를 취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이십 년 이상 본 책이 계속 다르게 읽힌다. 느림은 꾸준히 뒤돌아볼 줄 아는 자에게 일어나는 사태이다. 조급할 때 상기(想起)하는 능력은 상실된다. 그런데 인문학의 토대는 바로 이러한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니 인문학이 쓸모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나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성이 현상을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온갖 비약을 막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에 날개가 아니라 차라리 납으로 된 추를 달아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은 기술발전으로 인한 사회 ·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변화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아직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기의 시작일 수도 있다. 현재 미국 텍사스주의 한 산속에서는 (일상에서 말하는 의미의) 초침이 1년에 한 번, 분침이 100년에 한 번, 뻐꾸기가 천년에 한 번 나오는 거대한 시계가 제작 중에 있다고 한다. 이 시계제작 프로젝트에 투자를 한 어느 최고경영자는 인간이 기술진보를 통해 “경이로운 일뿐만 아니라 문명 차원의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의를 환기하며 이 시계를 “장기간의 사고를 위한 아이콘”이라 일컬었다. 지금 우리 대학의 시계는 어떤가?

승진을 위해 많은 논문을 써야 하는 부담을 안고 수업과 사업을 해야 하는 신임교수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 엄살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들은 나보다 더 힘없는 ‘을’일 뿐이다. 이 자리를 빌려 신임교수가 경력을 인정받아 승진기간이 단축된다 할지라도 승진을 위해서는 원래 정해진 논문 조건을 다 충족시켜야 한다는 규정은 신임교수를 옥죄는 부당한 것으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대학은 변신하고 있다. 본부는 지표를 먹으며 젊어지고, 교수는 그만큼 조로하고, 교수사회는 조각나고 있다. 교육부와 본부에 요구한다. 여유의 생산성에 귀 기울이고 대학에 느림을 허하라!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